금붕어 어항을 든 소년
"싱클레어."
소년은 꿈에 빠진 듯 몽롱하게 고개를 든다. 바닥에는 부서진 도자기 인형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기억난다. 할아버지의 친구가 주고 간 선물. 네가 싱클레어로구나. 그렇게 말하는 노인의 상냥한 눈길 속에서 그는 연민을 읽었었다. 너는 알버트의 자랑거리란다. 그 친구에겐 이제 너 말고 남은 게 없어. 언제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알겠니? 노인은 싱클레어의 어깨를 묵직하게 두드리며 인형을 하나 쥐여주었다. 항상 네 할아버지 곁에 있어주렴.
기억은 세계에 색을 입힌다. 소년은 불현듯 자신이 그 인형을 꽤나 아꼈으며, 방금 전 예기치 못하게 떨어뜨렸음을 상기한다. 순간 그의 마음이 찌르르 아파 왔다. 이 때의 소년은 바닥에 드러누워 인형을 돌려달라고, 어떻게든 고쳐 내라고 울며 떼쓸 줄 아는 아이였다. 모든 아이들이 으레 그래야 마땅하듯이.
그러나 소년이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그를 붙들었다. 군인의 억센 손길이 그의 작은 어깨를 내리눌렀다. 다섯 살의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현기증을 느끼듯 고개를 들었다. 알버트 시클라멘은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의 손자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마주보고 있었다.
"싱클레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겠니."
"인형을 깨끗이 닦고 싶었어요. 호라에게 부탁하긴 미안하고, 제가 좋아하는 인형이니까요. 그런데..."
"떨어뜨렸군. 괜찮아. 인형을 깨뜨려서 혼내려는 건 아니다."
알버트 시클라멘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주름진 입꼬리가 음울하게 처졌다.
"얘야, 나는 지금이라도 '레파로' 마법으로 네 인형을 고쳐줄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거란다. 왜인지 알겠니?"
"모르... 겠어요."
"익숙해져야 하니까. 지금 잃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이 인형은 앞으로 잃어버리게 될 것들 중 가장 작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깨뜨리지 않았더라도, 오늘 혹은 내일 깨질 수 있었을 물건이니까. 그런데 내가 여기서 네 인형을 고쳐주면 어떻게 되겠니?"
"모르겠어요."
알버트 시클라멘, 야간 공습으로 머글 아내를 잃고 훈장을 받은 남자. 전직 공군. 마법사. 불사조 기사단. 눈부신 공적으로 수많은 적들을 아즈카반에 보냈으나 죽음을 먹는 자들의 보복에 두 자식과 며느리를 잃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던, 그리하여 이제 홀로 남은 사내는 손자를 마주보았다. 그가 불행을 견뎌내는 자세에는 아주 의연한, 어쩌면 숭고하기까지 한 면모가 존재했다. 그는 손자가 자신의 얼굴을 물려받았듯 강철같은 마음 역시 물려받길 원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강해져 두 번 다시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원했다. 나는 어리석어 사랑하고 또 상처받았으나 너만은.
"네 손으로 직접 버리고 오거라."
팔에 가볍고 부드러운 압력을 남긴 채로 거두어지는 손. 싱클레어는 본능적으로 인형을 건넨 노인의 말을 상기했다. 너는 알버트의 자랑거리란다. 그렇다면 알버트 시클라멘의 자랑거리인 그는 저 말에 순응해야 마땅했다. 나이는 어려도 지혜롭게,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미련없이 보내주는 것이 옳았다. 그래야 했다, ... 그래야 했는데.
아, 그런데 어째서일까? 싱클레어는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울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종착지는 금붕어 어항이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항 속에 갇혀 있는 금붕어 신세이며, 자라날수록 세상은 비좁아진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놓인 것들- 예컨대 수초라던가, 가짜 수레바퀴, 축축하게 이끼 낀 자갈들, 타고난 혈통은 무엇이며 호그와트를 다니는 친구들이 누구인지를 정할 수 없다. 자유를 향해 달려나간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두꺼운 유리 벽이다. 어리석은 이들은 그 바깥의 세상을 염원하며 쿵, 쿵 머리를 찧어댄다. 그러다 어느 날 죽어버린다.
싱클레어 젤코바 시클라멘은 이 모든 것을 지도를 읽듯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아는 쪽이 모르는 쪽보단 낫지. 적어도 나는 어항 안의 것들로 만족할 수 있게 됐잖아.'
그의 정신은 그렇게 정지된 시간 속에서 부유한다. 허여멀건한 배를 까뒤집은 채로, 둥실둥실, 둥실둥실.
허무는 종교다. 어항의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일찍이 그 너머를 부정하기 시작한 소년은 그 종교의 서기관쯤 되었다. 그는 관조하듯 한 발을 물러서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시끄럽게 열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혈통에 기반한 가짜 승리를 손에 넣고 즐거워했으며, 또 누군가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전부 의미없는 꿈이다. 곰살맞은 조소라곤 없이 그렇게 생각한 그는 대단한 선의를 베풀듯 한 가지 사족을 덧붙인다. 그래도 꿈을 쫓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 설령 그 끝에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이 있다 한들 열망은 현재를 빛나게 하니까.
허무는 테두리다. 그 테두리를 방패막 삼아 그는 남들보다 빠르게 성숙할 수 있었다. 욕망도 애착도 알지 못한 채 생기 없이 떠밀려 흔들리는 지푸라기나 다름없는 정신. 공허한 소년은 멀리서 보기엔 어떤 파도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리라. 이따금 너무 가까이 다가온- 혹은 그에게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품은 이들이 그곳에서 나오라며 손을 뻗었으나,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오직 안온했다.
한 걸음씩 마음 속 소망으로부터 멀어지게끔. 누구도 자신을 잡을 수 없도록 멀리. 아무도 자신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소년에게는 그것이 당연하고 소년이 가야 할 길이었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상실뿐이니, 과정에서 무엇을 얻든 그만큼의 노력을 들일 가치는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이든 에클런드. 저 소년 역시 닿을 수 없는 어항 밖의 목표를 향해 헤엄치는 무수한 물고기와 다를 게 없을 텐데도. 네 꿈이 네게 있어서 떨쳐낼 수 없는 테두리가 되는 모습이 나와 겹쳐 보여서. 혹은,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에도 불구하고 종내 변하지 않을 사람 중에 당신이 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인간이었던 소년은 이든을 붙잡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이런 그의 모습을 알버트 시클라멘이 봤다면 아직 부족하다고 혀를 찼겠지.
그러나 가끔 세상은 만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더라도, 세계와 세계가 접촉하는 순간이 있다.
"싱클... 날 봐줘, 싱클. 나한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어. 모두가 나에게 이 길이 맞다고 해줬으니까."
세상이 만나고.
"그런데, 모두가 말하는 그 말이 맞아. 내가 용을 좋아하는 건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일 거야."
또다시, 떨어진다.
"하지만 난 그리 쉽게 무엇이든 잃지 않을 거야. 너랑 약속할게. 난 친구와의 약속은 절대 지킬 거니까."
너와 나의 수신호인 '이상없음, 나는 여기에 있다' 처럼, 난 늘 아무 일 없을 거고 결국 웃으면서 있을 거야. 붉은 머리칼의 소년이 웃는다. 싱클레어는 그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지나가는 착각이 든다. 약속이란 얼마나 의미없고도 공허한 것인지.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약속으로 마음을 덧기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기에 나는 숱한 약속을 쉽게도 하지 않았던가.)
세상과 세상이 멀어지는 순간엔 도자기 인형이 깨지는 소리가 난다. 금붕어 어항 속에 든 소년은 상대를 붙잡을 수 없음을 알고 슬프게 웃었다.
"그래, 너를 믿어. 네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거짓말을 해 조금 더 어른이 되었다.
"괜한 참견을 한 번 해봤어. 언제나... 몸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