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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럼펌 2023. 1. 20. 01:12

 

하느님,

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차분한 마음과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와

언제나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빌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었다.

 

- 제 5도살장 | 커트 보니것 중

 

 

 

내 이야기 말이야?

재미 없을 거야.

고작해야... 한 인형이 집에서 행복했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래도, 너는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곁에 있었으니까. 들려줄게.

지금껏 들어온 것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야. 나는 숨기는 게 적은 사람이거든.

 

 

인형의 집

 

 

 

하나.

 

이것은 근원의 이야기다.

 

이곳에서 몇 가지 간결한 사실만을 논하도록 하자. 대여섯 살의 싱클레어 시클라멘에겐 아끼는 인형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도자기 인형이 으레 그러하듯이, 부서지고 말았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소년을 불가능한 적들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 상실, 비애, 그리고 사랑같은 것 말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만물을 앗아가는 시간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으므로 다만 마음을 비워야 했다. 적어도 그것이 젊을 적 아내와 아들딸을 모조리 잃어버린 그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인형은 단 한 번도 '레파로' 주문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자신이 아끼던 물건의 파편을 제 손으로 주워다 버린 뒤 조금 울었다. 물론 해가 닿는 곳에서 울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좋게 보지 않을 테니까. 소년은 언덕 너머에서 훌쩍이다 붉어진 눈가로 돌아왔고,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했다. 집요정 호라가 수선을 떨며 그의 손끝에 붕대를 감아줬어도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의 작은 비밀: 그는 도자기 인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조각은 언덕 위 버드나무 등걸에 숨겨진 채 겨울을 나고, 봄을 나고, 여름을 났다. 수 해가 흘러 호그와트에 간 그는 친구들에게 조각난 인형을 고치는 법을 물어보았으나 마땅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완전히 단념하는 법을 알았다. 훗날 보가트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자기 껍질을 뒤집어 쓴 뒤에도 동요하지 않을 만큼, 이끼가 피고 곰팡이가 스는 동안 파편이 잠든 곳에 단 한 번도 걸음하지 않을 만큼.

 

어느샌가 그는 거울 속에서 노인이 창조한 인형을 보았다. 사람일 적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웃었더라.

 

그렇게 해서 그는 과거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둘.

 

이것은 한계의 이야기다.

 

거울 세계의 토끼는 묻는다. 언제까지 슬픔을 외면할 수 있겠느냐고. 슬퍼하지 않는 이는 도자기처럼 쉬이 부서지고 말 거예요. 상처받은 곳을 보호하고, 인지하고, 회복할 수 없을 거예요. 사랑을 느끼지 않기 위해 자신의 털 난 심장을 뽑아낸 마술사는 결국 바닥 위에 엎드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까.

 

인형은 답한다. 슬픔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부식시키기 위해 존재한다고. 극복할 수 없는 상대로부터 등을 돌리는 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털 난 심장의 마술사가 죽은 이유는 부인의 청을 들어줬기 때문이며, 부인을 곁에 들이지만 않았다면 그는 그의 성에서 영영 평온했을 거라고.

 

(인형은 그의 집에서 행복했습니다. 그것을 행복이라 부를 수 있다면 말이죠.)

 

거울 세계의 토끼는 낭송한다.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깨지고 부서져 그 파편이 다른 이를 찌르고 말 거예요. 당신을 보는 이를 슬프게 할 겁니다. 그리고 폴짝 뛰어 굴 속으로 사라진다.

 

살고자 하는 거미가 묻는다. 너는 영웅이 되고자 하냐고. 모순이 있는 자는 영웅이 될 수 없어. 나는 살고 싶지만, 죽음보다 끔찍한 후회를 하느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죽고 싶어.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은 채 오래오래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야? 한낱 인간 주제에 영웅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인형은 답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고, 그저 값을 치르는 인형일 뿐. 선대의 피로 적셔진 역사 위에서 평화를 누렸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해. 감히 행복을 바란다면 그 또한 잘못된 일이야.

 

거미는 떨며 말했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너희 생각을 했어.

 

인형은 손을 들어 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로 인해 행복했다면 우리를 위해 죽었어야지. 그리고 그는 거미를 나무로 보낸 뒤 혼자 남는다. 오도카니 나무를 바라본다.

 

기원의 쥐가 묻는다. 너는 죽고 싶으냐고.

 

인형은 답한다.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와, '죽어도 상관없다'는 완전히 별개라고. '죽어도 상관없다'와 죽고 싶은 것 또한 별개의 문제라고. 그는 죽어도 상관없었으나 죽고 싶지 아니하다고. 다만 소원이 있다면 제 죽음이 누구에게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잊혀지는 것이며 그것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이타利他라고.

 

(인형은 죽음에 맛이 있다면 구름과 딸기의 맛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원의 쥐는 독경하듯 읊는다. 잊힌다는 것은 너의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 끼쳐온 영향들을 모두가 부정해 줬으면 하는 거야. 만약에 네가 죽으면, 나는 평생 기억할 거야. 내가 죽어도 울지 마. 이걸 다 줄게. 그리고 쥐는 온갖 맛이 나는 젤리빈 한 봉지를 인형에게 떠안기고 굴 속으로 사라진다. 인형은 토끼도, 거미도, 쥐도 붙잡지 않은 채 봉지를 들고 가만 서 있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그는 현재를 바꿀 수 없게 되었다.

 

셋.

 

이것은 단념의 이야기다.

 

 

인형은 자리에서 파편들을 줍는다. 손이 베이는 것을 개의치 않고 파편들을 줍는다. 그는 우정을 거부했으므로 친구가 없다. 애석함을 알아도 슬픔은 모른다. 즐거움을 알아도 행복을 모른다. 짜증을 알아도 분노를 모른다. 기꺼움을 알아도 애정을 모른다. 그의 감정은 얕고 심장은 굳어졌으며 성품은 결여되었다. 사회는 그것을 어른스러움이라고 불렀으므로 그는 자신이 어른스럽다고 여겼다.

 

그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의 친구들이 붕괴되고 있다. 그 모습에서 그는 기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만일 그가 어른스럽지 않았더라면, 저들을 친구라고 한 번이라도 불렀더라면 심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붙잡고 싶어서 절실해졌을 것이다. 그런 나약함은 이용당한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마셜은 분노를 뒤로하고 꿈을 접는다. 가문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로넨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티에르난은- 그가 어째서 스스로를 그토록 몰아붙이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싱클레어는 그것이 성 뭉고 병원에 몸져누운 어머니와 관련있다고 짐작했다- 수많은 계약에 발이 묶였고. 야망을 놓지 못한 체스터는 패싸움에 끌려다닌다. 무엇보다 삶을 사랑하는 아라크네는 거미가 되어 제자리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감정이라는 것을 애시당초 마음에 품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인형은 가만 웃는다. 웃으면서 눈물처럼 파편을 줍는다.

 

네가 무너지는 자리에 내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파편을 주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차라리 터키 젤리 때문에 배신한다고 하면 동화같고 좋았을지도 몰라. 모든 동화는 행복하게 끝나잖아. 나는 아무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지만 적어도 최대한 많은 이들이 행복하기를 원해."

 

소년은 당신을 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장치의 신이 내려와 모든 걸 구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알고 있다. 모든 역사는 피로 쓰여졌듯, 이번에도 다르진 않을 거라고. 한 걸음을 떼기 위해 무수히 많은 좌절이 덧칠될 것이다. 제아무리 놀라운 영웅이라도 목숨 하나는 그저 목숨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당신은, 모두를 구하진 못할 것이다... ...

 

그렇게 해서 그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자신의 볼을 찌른 당신의 손을 잡고 느리게 만지작거린다. 멈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인형이 소년이 되어서, 상처를 입어도 완전히 부서지진 않는 게 가능할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까? 나보다 너무 이르게 죽은 당신의 곁에 꿇어앉아 어떤 생각을 해야 맞을까?

 

고개를 들어 샛노란 눈을 마주한다. 조금은 길 잃은 아이같은 낯빛으로.

 

"이 이야기의 끝에 행복한 결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아이먼 휫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