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젖힌다. 꿈을 꾸는 듯한 두 눈에 밤하늘의 풍경이 가득 들이찬다. 켄타우로스들은 천체의 정렬을 보고 미래의 징조를 읽어낼지 모르나, 무지한 그로서는 그저 아름답게 느껴질 뿐이다. 이어 시선을 내리면 당신이 보인다. 의혹과 불안, 진심과 거짓이 구별할 수 없이 뒤섞인 붉은 눈동자. 운명에 쫓기고 죽음에 짓눌려 여기까지 도달한 방랑자.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저 눈 너머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 명의 인간을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은 천치나 저지를 법한 실수였으나 당신은 예외였다.
"네게는 미안한 게 많아."
나직하게 말하며 몸을 천문탑의 벽에 기댄다. 피를 잃어 어지러운지 시야 속의 당신이 번지고 이지러진다. 자꾸만 미끄러지려는 발에 힘을 주어 버티자. 염치없다 해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정말, 정말 많아서...
"아라크네 시어러. 너의 약한 부분은 진작에 알고 있었어. 잘못 하늘에 부딪혔다간 부서져버릴 텐데 위험천만한 높이까지 올라가는 걸 보고도 붙잡지 않았지. 네 비행을 더 보고싶었나 봐." 그랬다. 당신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다치고 싶지 않아 한 켠으로 빠져있는 나 대신 별을 움켜쥐길 바랐다. "쇠락하고 변치 않길 바랐어. 멋대로 이기적인 기대를 걸어놓고, 정작 네가 무너진 뒤엔 돕지 않았지. 나는 지금 널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하는 게 아니야. 네가 그렇게 될 줄 알고도 가만 둔 것을 이야기하는 거야... ..."
이빨 사이에 부딪힌 막대사탕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싱클레어는 웃지 않았다. 막대사탕의 손잡이를 쥔 채로 잠자코 입 안에서 굴리다가.
"그때의 넌 날 잘못 봤어."
불쑥, 덧붙인다.
"누군가에겐 변치 않는 내 모습이 의지할 만한 기둥처럼 보였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거 알아? 패배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만큼 비겁하고 이기적인 인간은 없어."
당신이 할머니를 잃었을 때. 형태 없는 유령으로 존재하던 '시어러'라는 이름의 무게가, 갑작스런 죽음의 공포가 당신을 완전히 부수어 놓은 뒤에. 그는 당신의 손을 잡아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에게 날아오르란 격려를 한 이상 추락 뒤의 파편을 줍는 것 또한 그의 의무였다. 그는 그 의무를 저버렸고 그럼으로써 당신을 버렸다.
네가 그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는 날엔, 내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거야.
한없이 가라앉은 네가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오는 날엔 손을 잡고 끌어올려 줄 거고.
그 약속의 가장 부당한 점이 무어라 생각하는가? 지켜지지 않았다는 건 싱클레어 시클라멘이 저지른 과실 중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는 교묘한 말로써 모든 행동의 책임을 당신에게 전가했다. 잘못 든 길에서 돌이켜 돌아오는 것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잡고 아득바득 올라오는 것도 모두 너의 몫이라고. 싱클레어는 그저 늘 하던대로 위치를 지키며 파수꾼 행세를 했을 뿐이다. 애시당초 의지할 만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기만, 전부 기만이다.
그러니 당신의 원망은 정당했던 셈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렇게 떠들어대는가? 한동안 침묵하며 사탕을 깨물어먹던 그는 마지막 조각이 혀 끝에서 녹아 사라진 뒤에야 팔을 힘없이 늘어뜨린다.
"너는 미안할 게 없어, 아라크네. 미안해야 하는 건 내 쪽이지. 끝까지 어려움 한 조각 나눠가지지 않은 채로 먼저 죽어버린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네 앞에 이렇게 서있는 거냐고 묻는다면, 하하, 글쎄. 자격을 따지자면 감히 그럴 순 없겠지. 그런데 나는 여전히 너무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 이것 말곤 방법이 없네."
값싼 동정? 그럴지도 모른다. 받는 사람이 쪽도 않는 속죄? 맞는 말이다.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 또한 그만큼 마주 사랑한 '시어러'를 대체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요한 메이웨더가 살아있을 적에도 그러진 못했다. 어쩌면 이타카는 포세이돈의 화를 사 영원히 침몰했고 당신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영영 헤맬 것이라.
그래도.
"네게 입힌 상처, 지키지 못한 약속에 대해 사과할게." 한 손으로 가슴팍을 짚은 채 고개를 숙이는 제스쳐는 정중하고, 목소리는 더없이 진지하다. "네 오라비의 자리를 전부 대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동정이 아예 없다곤 하지 않을 거고. 하지만 친구의 의무는 상대방을 걱정해주는 거고, 필요하다면 붙잡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 책임을 다하려 해. 들어줘, 아라크네. 네가 겪은 상실은 작지 않아. 정의를 바로세우며 바람같이 떠돌아다니는 네게 단 한 가지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곁을 지켜줄 친구들이야.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어. 섬이 되려 하지 말고 우리를 옆에 둬. 시간을 거슬러온 우리들은 운명 앞에 무력한 패배자가 되지 않아."
의지해 줄 수, 없겠어?
염치 없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두 번째 삶에 나선 청년이 당신을 바라본다. 일자로 다물린 입은 슬프고 진지하다. 어쩌면 당신의 피붙이가 종종 지었을 표정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