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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들의 무덤에서 태어난 것

9월 1일.

 

오전 11시. 호그와트로 향하는 기차가 9와 4분의 3 승강장을 출발했다. 교수님 한 분께서 우리를 (-여기서 우리는 1학년들을 의미한다-) 기차칸으로 밀어넣으면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나와 함께 기차를 탄 애의 이름은 한니발과 맬리셔스다. 맬리셔스라니, 처음엔 말-레-티우스Malethius가 아니라 맬리셔스Malicious인 줄 알고 무슨 저런 이름이 다 있나 싶었지. 알아, 호라. 사람을 이름으로 놀리면 안 돼. 그건 반성하고 있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애의 아버지 이름은 오브녹셔스라고 했다. 정말 작명 센스 하나는 터무니없는 집안이다. 그 집안... 맬리셔스라는 아이는 자신의 집안을 몹시 자랑스러워한다. 그 밖에도 이런저런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듯하다. 내가 호라와 이야기하는 걸 봐서인지 나를 명망 높은 집안의 자제로 생각하는 눈치던데. 내 할아버지께서 머글 태생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일까?

 

사실 별 감정은 없다. 저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눈을 감으면 선히 보여 딱할 정도니까. 가진 것은 혈통밖에 없어서, 어떻게든 자기네의 우월성에 대한 헛된 믿음을 붙잡고 상대를 깔아볼 것이다. 지금의 천진하고 미숙한 구석은 금세 사라져 보다 추한 감정으로 대체되겠지. 별로 기대도 안 되고, 실망도 안 들 것 같다.

 

문제가 있다면 저 애의 폭력성이다. 우월감의 뒷면에는 불안이 있으니까. 좌절된 뒤엔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다른 아이들을 해칠지도 모른다. 적당히 통제 하에 두는 게 좋겠지. 다행히도 맬리셔스 밀스톤은 자기애가 몹시 강한 편이라, 이 사실을 적당히 이용하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9월 1일.

 

신난다! 첼 교수님과 함께 킹스 크로스 역에 왔다.

말로만 듣던 호그와트에 드디어 가볼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역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샴이라는 애랑 매년 인사하기로 약속했고, 티에르난은 곱스톤 클럽에 들어와 주겠다고 했다.

케인이라는 애는 내게 장난을 쳤는데, 뭐였는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리고 맬리셔스라는 애도 있었는데, 어딘가 굉장히 화가 나고 불안해 보였다.

처음엔 그 애가 보호자를 잃어버린 줄 알았다.

왜 그럴까? 내가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 다음에 보면 쿠키라도 줘야겠다.

첼레스타 교수님의 쿠키는 언제나 맛있으니까.

 

 

 

1월 30일.

 

맬리셔스에게 영시를 읊어주었다.

그 애는 향기로운 장미 속 벌레같은 치부가 있다는 말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10월 29일.

 

2학년이 시작되었다! 맬리, (-나는 맬리셔스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맬리는 공부가 어려운 모양이다.

나도 그렇게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변신술은 그럭저럭이니까!

같이 공부하면 좋겠다. 겸사겸사 곱스톤 게임도 하면 좋고.

첼 교수님께서 맬리를 잘 챙겨달라고 한 것 외에도, 그냥... 그 애는 마음이 쓰이는 구석이 있다.

가만 뒀다간 어딘가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다.

 

 

 

11월 1일.

 

맬리셔스가 점점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해간다. 전형적인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무너진 자존심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단순한 말조차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일 테지. 모든 것이 예상한대로 변해간다. 어린 시절의 순진함은 무의미하다는 증거다. 적당히 다독이자. 그 애의 신경질 때문에 순한 친구들은 곧잘 겁을 먹는다. 그래도 아직 내 말은 잘 들으니까... ... 

 

지루하냐고? 딱히.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 생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 종종 경멸을 불러일으키긴 해도.

 

있지, 나는 그 누구라도 죽기 전까진 설득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갱생할 수 있다고 믿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사람들도 눈에 보이곤 하는데, 너는 결국 네 부모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 같네. 시작은 주저하는 걸음이더라도 그 끝은 너무나 뻔해서... ...

 

 

 

3월 2일.

 

맬리와 함께 부엌에 갔다. 호라를 소개해주었다. 맬리는 불안한 얼굴을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집요정들과 너무너무 잘 지내고 싶어해서 초조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동시에 이만큼 평화로워 보인 적이 없다. 앞으로 자주 데려와야겠다.

 

 

 

9월 1일.

 

오늘은 맬리셔스에게 드러내놓고 모욕을 주었다. 대놓고 척을 졌으니, 이제 더이상 당신을 용인하는 체 하지 않아도 된다.

 

기쁜가? 잘 모르겠다. 그 정도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드물어서. 하지만 할아버지의 인생을 망쳐놓은 밀스톤의 핏줄에게 그만큼 정중하게 대하는 것도 썩 고역이었다.

 

맬리셔스 밀스톤은 이제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다. 살인자의 자식은 살인자로 클 것이다. 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요즘 들어 어떤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해지고, 첼레스타 교수님의 죽음은 무겁기만 하다. 나에겐 시간이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희망을 보여드려야 한다. 당신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당신의 역사는 죽지 않았어요. 제가 모든 걸 바꿔놓을 거예요. 모든 걸 돌이킬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16세, 여름.

 

맬리가 집요정과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게 호라는 가족이고, 맬리는 친구니까, 양쪽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어.

 

 

 

25세, 겨울.

 

-맬리셔스 밀스톤에 대한 동정의 여지는, 전혀 없다.

 

하지만 궁금한 게 있어. 너는 왜 그렇게 불행한지. 단 한 번도 다른 가능성을 검토해보지 않은 것처럼 온전한 레이디 밀스톤으로 자랐으면서, '파타 모르가나'를 즐겨 마시며, 쓸모있는 이들에게 선물을 하사하고, 매 순간 독살을 경계하고... 변론의 여지 없이 '그 사람'의 수하이자 악인처럼 구는데. 어째서 권력의 가장자리만 전전하는 기분이 드는지.

 

그게 네가 바란 게 맞는지 묻고 싶다가도 관두게 된다. 세상엔 맬리셔스보다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사람이 지천에 널렸으니까. 이럴 시간에 편지 한 장이라도 더 훑어보고 정보를 정리하는 게 나을 것이다.

 

 

 

 

27세, 겨울. / 17세, 가을.

 

맬리셔스가 죽었다.

그가 죽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았다.

근처에는 누구도 없었다. 쓸쓸하고 비참한 죽음이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사에게 데려갈 수도 있었을까?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았고, 둘째로, 맬리셔스 본인이 거부하기도 했다.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부탁 정도는 들어줄 수 있었다.

나는 언 흙을 파내어 간이 매장을 치루었다.

묘비 없는 봉분을 뒤로 하며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

 

마지막 순간에, 나는 당신을 그렇게까지 경멸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

 

 

 

여기 폐허가 되지 않기 위해 불모지가 되길 택한 하나의 정신이 있다.

 

버쩍버쩍 마른 모래를 파헤치면, 그 아래에는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편지들의 무덤이 자리한다. 그 무덤으로부터 태어난 소년은 이제 청년이 되어 당신을 바라본다. 눈꼬리는 부드럽게 처졌고, 어쩌면, 약간의 연민과 이해를 담고 있었다. 지난 생에는 허용하지 못했던 감정들.

 

"꼭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어쩌면 바보가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도 모르는걸." 슬쩍 고개를 기울여, 당신을 바라본다. 입가의 미소가 흔들리는 듯 하다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진 않을게. 맬리, 나는 네가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그냥,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아즈카반이 얼마나 부조리한 시스템이고, 머글식 감옥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유익하고, 법은 징벌이 아니라 교화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볼드모트조차 인권이 없는 존재로 비물질화 되어선 안 된다... 그런 담론은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간 묻어둔 모든 편지들이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고 있나 보다.

 

"무슨 죄목으로 자수하려는 생각이야? 네 팔뚝의 문신? 네가 이중 첩자 노릇을 여태 해왔다는 사실을 증언할 내가 있는 이상 어림도 없을걸. 네 머릿속의 죄는 이 세계선에서 증명할 길이 없고."

 

내 친구가 사라지는 걸 원치 않아.

 

"...감옥으로 도피해 사라지는 것 대신 밖에서 속죄하면 안 될까?"

 

네가 행복하길 원해.

 

"나는 현명하지 않고, 우군이나 동맹 대신에 너희를,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서..."

 

이유는 점점 터무니없고 유치해진다. 그러니까, 싱클레어 시클라멘이라는 인간은 당신이 자격이 있는지와 무관하게, 이 전쟁에 모든 걸 불태운 나머지 목적의식을 소진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 생에 당신의 불행을 예상했어서. 그리고 당신은 그의 손바닥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뇌리에 아주 오래도록 남아 이번 생의 무의식까지 넘어온 까닭에.

 

"...내 백 번째 크리스마스 파티에 너도 오면 좋겠어..."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 집요정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만큼 아끼고, 적으로 나타난 아버지를 향해 저 아저씨는 뭐냐며 일갈을 퍼붓고, 살집이 붙을 정도로 부엌에 드나들길 좋아하던 당신이, 맬리셔스 밀스톤이 아니게 된 '맬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