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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의 겨울, 그 끝에서

 

 

 

힘이 풀린 손끝에서 소맷자락이 스르르 빠져나간다.

 

루비 비틀우드는 난간을 타고 아래층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층계의 끄트머리에서 폴짝 뛰어내린 뒤 고개를 들자 당신이 보인다. 망친 시험지처럼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뺨은 새빨갛게 붉히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서있는 당신이. 그러니까, 사랑이란 대체 뭘까? 고모부는 아주, 아주 귀하고 손 대기도 힘든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라는데. 툭하면 저런 얼굴이 되어버리는 나나 너를 누군가 사랑해준다는 게 참 이상하지 않아? 내가 저 얼굴을 마냥 좋아한다는게.

 

철부지 어린아이, 제 마음을 표현할 줄 모르고, 툭하면 떼를 쓰고, 울고, 화내고, 발을 구르고. 사랑을 넘치도록 받아 정작 사랑을 주는 법은 배우지 않았던 열네 살의 우리. 누군가는 우리를 구제할 도리 없는 꼴통이라고 부를지도 몰라.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착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 꼴을 보라지...

 

그런데 말이야,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들어. 사랑을 꼭 배워야 알 수 있는 걸까? 부대끼다 보면 정이 들고, 싸우다가도 보고 싶은 것. 무심결에 잘 지내나 걱정하게 되고 괜스레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다른 사람이 주는 사랑을 탐욕스럽게,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가던 아이는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을 향해 달려간다. 한 번에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느라 너덜해진 구두 한 짝이 벗겨진다. 구두가 저 먼 층계 아래로 굴러내리는데도 뒤조차 돌아보지 않는다. 루비 비틀우드는 자신이 내려갔던 계단을 돌아와 당신을 와락 끌어안길 택한다.

 

내 첫 친구. 내 최악의 친구!

 

"그래, 바보야." 당신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마구 헝클어뜨리며, 루비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은 새파란 겨울 하늘처럼 상쾌하다. 마치 당신이 그 말을 하리라고 여태 예상해 왔던 것처럼.

 

"나도 네가 미워. 그러니까 곁에 있을게."

 

루비는 쥬디트가 자신을 붙잡길 바랐다. 조금 못생기게 코를 훌쩍이고 울고 골목대장 노릇을 해줬으면 했다. 항상, 모든 순간에. 그것이 루비 비틀우드가 가장 즐거워하는 쥬디트 아샤 노블의 모습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