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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펠리아] Chanson Réaliste

성 뭉고 병원의 장기 입원실. 이 복도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유독 앞을 지나갈 때 발소리를 죽이게 되는 병실이 있었다. 무딘 황동이 번득이는 명패엔 단 두 개의 단어만이 새겨진 채다. 'F. Blanki'.

 

1인실의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창가의 화병이다. 노을의 무게조차 버거워 꽃 한 송이는 시든지 오래였고 물에는 말라죽은 뿌리가 둥둥 떠다닌다. 벽면 전체를 차지한 창문을 통해 주홍색 해가 짓쳐들어온다. 빛 속을 부유하는 먼지 알갱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느릿느릿 자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이 병실을 어지럽히는 움직임이라곤 일절 없다.

 

여기 하나의 삶이 저물고 있다.

 

불꽃같은 삶이었다. 혹은 불꽃을 쫓은 삶이었다.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왕을 단두대로 보낸 자들의 피. 그리핀도르의 붉은 기 아래에서 혁명을 외쳤고, 치기어린 열망은 몇 번의 담금질을 거쳐 진실한 꿈으로 변모했다. 금빛 머리칼을 흔들며 웃던 순수하고 당찬 소녀는 대의의 선봉장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과분한 자리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펠리아 베아트릭스 블랑키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그가 맞은 저주는 목숨을 끊을 정도로 독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술과 담배로 시간을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아직 젊은 축에 속하는 펠리아 블랑키는 목숨을 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상할 정도로 후유증을 오래 앓았고 끝내 이렇게 숨이 꺼져가고 있었다.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찾아왔더라면. 아론 오닉스의 무뚝뚝한 표정을 다시금 눈에 담고, "오래 살아." 라는 말과 함께 손등을 서늘한 감촉이 쓸고 지나갔더라면. 그랬다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전부 가정일 뿐이다. 상송의 선율이 한 세대의 종말을 연주한다, 느리고 착실하게.

 

Des nuits d'amour à plus finir
Un grand bonheur qui prend sa place
Des ennuis, des chagrins s'effacent
Heureux, heureux à en mourir...

 

사랑의 밤들은 끝날 줄을 모르고

커다란 행복이 그 자리를 차지했죠

걱정과 고통은 사라졌어요

행복해요, 죽을 만큼 행복해요...

 

"...아무도 문병을 오지 않아..."

"그럴 수밖에. 가까운 이들은 다 죽었다고 했으니."

 

치료사들의 나직한 음성이 열린 문틈으로 들려온다. 녹슨 채 침대 시트 위에 얹어져 있던 의수의 손가락이 움찔한다. 펠리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창문 쪽으로 고개를 튼다. 베개 위로 흩어진 머리칼이 따끔대며 뺨을 찔렀다. 숨이 다해가는 이 순간, 그의 눈에 일몰의 마지막 꼬리가 들어온다. 그저 공허했다. 모든 걸 이뤘는데. 이제 마음 놓고 눈을 감을 수 있는데.

 

빛바램이 이토록 벅차게 서글픈 이유를, 그는 알고 있다.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겨울 뒤에 온 그의 봄에게, 혁명에게, 그가 사랑한 작은 세상에게. 숙명이 앗아가 지금은 이곳에 없는 너에게.

 

"좋아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때 사랑스러워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