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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곳에서 너를 생각하며.

가장 다정했던 내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게 이 글을 바친다.

 

 

 

"...있죠, 싱클레어. 저도 당신처럼 이상적인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착하고, 진실되고, 사람 좋고, 친구도 많고, 근데? 되게 어렵더라고요."

 

잠시의 간극이 흐른다. 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샛노란 눈은 불투명한 유리 구슬처럼 먼 곳을 비추어 반들거렸다.

 

"진실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가끔은 되고 싶었어요. 제 부모님은 언제나 그런 것들을 바라셨거든요. ... 난 그런 이가 되었나... 아닌 것 같네."

 

기묘한 어투로 끝맺어진 말은 미완성된 채였다.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제아무리 무던하려 애를 써도 결국에 예민한 아이였으므로. 네게서 이질감을 느낀 것도, '라이 휫룩'이 어쩌면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전부 그 때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느낀 기묘한 안도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먼 클라이브 휫룩. 목을 구부정하게 앞으로 빼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치를 보는 소년. 킹스 크로스에서 너를 처음 보았을 때 감상이 어떠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너'는 평범했다. 혹은 그렇게 보이려 노력한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방심했고, ... ... 네가 나의 세상 속으로 한 발을 들이밀게 둔 것이 실책이었다.

 

있지, 나는 나아가는 법을 몰라. 공중에 떠있는 먼지 한 톨조차도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조용한 집에서 자라났으니까. 그 집에는 슬픔을 이겨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나는 우리 할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분께서 살아계셨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상실에 살해당한 껍데기를 보았어. 나도 그렇게 될까봐 죽을만큼 두려워했던 건 그런 이유야. 잃어버리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무엇도 곁에 두려 하지 않았어. 너한테도 그랬어야 하는데. 네가 조금 덜 바보같아 보이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럴 수 있었는데.

 

기억 저편에는 언제나 두 소년이 앉아있다. 검은 호수가 발치에 찰싹인다. 너는 느리고 띄엄한 어조로 후플푸프에 가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조잘거림은 풀벌레 소리와 더불어 풍경의 일부가 된다. 초가을의 바람이 우리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헝클이고 지나간다. 내 등허리는 반듯했고 너는 좀 더 구부정했다. 그 정도는 돌아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아이먼 클라이브 휫룩. 나는 널 진실로 본 적이 있었나? ...아닌 것 같네.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네 시선이 어딜 향해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네 눈에 비친 세상은 분명 아름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 네 이해조차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참 신기한 일이야. 피어나는 꽃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설득력 있게 속삭일 수 있었을까. 져버릴 것이라 말하며 지금의 아름다움마저 외면하는 건 너무 아깝다고. 우리의 기억 속에 그것은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살아있을 거라고. 그러니 너는 이 자리에서 날 기다리겠다고. 나는 짐짓 그 말을 흘려듣는 척 앉아 있었지만 사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가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붙잡고자 하는 날이 온다면, 그건 아마 네가 들려준 말 때문일 테니까. 계속 네 생각을 할 거야."

 

그렇게 답했던가.

 

축하해, 라이 휫룩. 이 거짓말쟁이. 너는 내 두려움이 되었구나. 그것도 아주 다정하고 상냥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원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이제 만족하겠어?


 

몇 년이 훌쩍 흘러 비로소 당신을 돌아보았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당신의 뒷모습이었다. 그것도 훌쩍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해서, 나는 조급해졌던 것 같다. 고목처럼 두 발을 지면에 박아넣고 겨울의 무게를 견디던 버릇조차 잊을 정도로. 당신은 나더러 자신의 빈자리를 다른 이로 채우라 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나는 애초에 곁에 사람을 두지 않는다. 당신은 사고였다. 내 톱니바퀴에 끼어 들어온 이물... ... 당신과의 칠 년같은 사고를 두 번이나 겪게 둘 리 없지 않은가. 결국 당신도 끝끝내 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나는 당신을 비난해야 옳았다. 혹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할 수도 있었다. 역시 내가 옳았다고. 모든 것은 변하고 떠나가니 그 무엇도 신뢰하지 말자고, 독경하듯 되뇌이며 당신을 고독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로 삼는 것이 '싱클레어 시클라멘'이 할 법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는 절박했다. 내가 속고 패배했다는 걸 시인하고도 기꺼이 더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네 거짓말이 듣기 좋았으니까.

 

미리 말해두건대 그것은 순전한 친애가 아니었다. 너는 어떤 이득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도 끈질기게, 지루하게 내 곁을 지켰다. 나는 너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네 음성에서 지나가지 않은 시간들의 찬란함을 감각했다. 그렇게 너는 흘러가는 구름이나 단조로운 시계 소리처럼 기어코 내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이후 네가 나에게 허락한 유예에 감사한다. 역시 너는 다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너의 모습이 이상에 불과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을 안다. 허나 피상적인데다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칠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너의 상냥은 틀림없이 나의 세상을 바꾸었어, 유서프 레컴풋. 네가 해준 모든 말들이 내 기억 속에 추억으로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고.

 

나는 죽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너를 기다렸다.

 

 

 

 

이것은 네가 알고 있는 싱클레어 시클라멘의 마지막 회고야. 아마 이 뒤에 기적이 일어나 새 숨을 얻는다 한들, 그것은 정말로 '내'가 되진 못하겠지. 상실 하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겁쟁이에 비겁자인 주제에 용케 그 사실을 들키지 않은 나 말이야. 다만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지라도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아니까.

 

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자. 유서프 기어 레컴풋에게 아이먼 클라이브 휫룩이 있었듯, 싱클레어 젤코바 시클라멘에겐 두 번째 삶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조금 더 바보같고 허술하면 좋겠다. 상처받을 용기가 있고, 걷어차여 깽깽대더라도 완전히 떠나진 못했으면 한다. 당신이- 당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줬으면 한다.

 

내 얼굴을 하고 있을 그 이야기가 당신에게 위로가 됐으면 한다.

 

뛰어서 쫓아갈 것이다. 기다려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동안 정말로 고마웠어.

 

 

언제나 이곳에서 너를 생각하며.

 

너의 친구, 싱클레어 시클라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