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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받은 시대여, 안녕히.

싱클레어 젤코바 시클라멘은 호숫가를 천천히 걷는다. 평화의 종말은 소란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되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하다. 검은 호수는 말없이 파동을 흘려보내고, 첼레스타 교수님의 시신은 간데없었으며, 아이들은 더이상 소리 높여 언쟁하지 않았다. 학교 전체가 장례식마냥 고요했다. 숨 죽여 소곤거리는 아이들의 곁눈질에서는 공포가 느껴졌다. 꿈에 부풀어 마법 학교에 입학했던 열한 살들은 이제 한평생 눈앞에서 벌어졌던 살인의 악몽을 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 그의 책임이었다.

 

문을 연 것이 그가 아니어도. 배신자의 이름 하나 알지 못해도. 분명 그가 지난 몇 년 동안 웃고, 인사하고, 가만 용인했던 자들 중 하나였으리라. 싱클레어는 한 손으로 나무등걸을 짚는다. 멍하니 더듬는다. 충격과 패배감에 굽어진 등은 어느새 친구들보단 그의 할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괴로웠다. 이름붙일 수 있는 감정은 수치심 하나.

 

할아버지, 저는 당신을 존경하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몸을 돌려 재차 호숫가로 향한다.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흑단나무 지팡이를 꺼내든다. 간밤, 프로테고 하나 외치지 못한 지팡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힘과 적의로 이야기하던 때는 지나갔다고요. 당신에게는 당신의 방식이 있었듯, 저에게는 저의 방식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새로운 잔엔 새로운 술이 담겨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모두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때로 그것이 효과가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제 방식을 비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그저 감정적이고 어리석다고만 여겼어요. 강경하게 옳음을 밀어붙이는 자가 있다면 누군가는 가운데에서 중재해야 한다고.

 

지팡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고쳐 잡았다.

 

참는 것은 저의 힘이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상냥하고 다정하다고 불렀어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하진 않았으나 한편으론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시클라멘'이라는 이름이 제 발목을 잡아도, 할아버지에 의해 부모나 친척을 아즈카반에 잃은 학우들의 시선이 달라붙어도, 결국에는 신뢰를 사는 능력. 그것만 있다면 부족하게나마 이 상황을 꿰어맞출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한 명 한 명 속이고 꾀어내 설득하면 언젠간 이 지리한 싸움이 끝날 거라고.

 

맬리셔스 밀스톤- 네, 저는 그의 친척들이 제 부모님을 죽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 아이의 성정을 이용해 제 눈치를 보게 하면서, 로넨 프레이아가 순혈주의자들과 어울리다가도 한 번씩 자신이 왜 그 길에 올랐는지 상기하게 하면서, 아라크네 시어러가 자신이 돌아올 곳이 있음을 기억하게 하면서.

 

기억이, 기억이 소용돌이친다. 첼레스타 교수님께서 나누어 주시던 쿠키. 휴게실에서 한가로이 농담을 주고받던 시간들. 수줍게 웃으면서 맨드레이크에 대해 설명하던 허비 교수님- 무표정한 뺨이 가볍게 경련한다. 자리에 서있기 위해 그는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어째서 어제 그는, "나는 알버트 시클라멘의 손자다. 목적을 밝혀라!" 라고 외치지 못했는가. 그것이 개죽음으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1학년들을 지켜야 해서.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해서-

 

(정말?)

 

그게 답이 아님을 알잖아.

 

때로 할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프리마베라 아이들의 공연에서 할아버지가 벌인 소란은 제 이해 밖의 일이었어요. 모든 것에 애착을 버리라 가르친 당신께서 어째서 평정을 잃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저 당신을 모시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제 역린이었습니다. 관객으로 와있던 이들의 눈에 당신을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기껏 쌓아올린 신뢰가 당신으로부터 제게 흘러온 핏줄 하나로 망가질까봐.

 

언젠가 선택할 때가 올 거야. 누군가 그에게 말했었다. 그럴 리 없다 생각하며 웃었다. 지금의 침묵이, 방관이, '평화'가 너무 중요한 나머지 누군가에겐 단 한 순간도 평화가 없었단 사실을 망각한 게 아니냐 지적받았을 때도 그는 그저 미소했다. 그 또한 평화를 누린 적은 없었다 여기면서. 왜 넌 같은 비난을 저쪽에는 하지를 못할까?

 

'넌 지금까지 뭘 해봤고, 뭘 실패했는데? 학교에 학비 외에 추가 장학금 지원을 건의해 봤어? 아니면 하다못해 케인즈에게 용돈이라도 좀 빌려줘 봤나? 아이들이 당하다 못해 반응해 싸울 때 "싸움은 나쁜 거"라고 웃으며 말리는 것 말고 말이야. 내가 혼자 화장실에 처박혀서 우는 1학년 꼬맹이들에게 넌 혼자가 아니며 돕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 벽보를 쓰고, 매일 점심시간마다 차별은 나쁘다고 뻔하디뻔한 문구 적은 피켓 들고 서 있고, 광고 깃펜에 모아 놓은 코인 족족 탕진하는 동안 너는 뭘 했어? 내가 다른 아이들한테 조금씩이라도 좋으니 함께하자고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후플푸프 기숙사에서 매번 애들 붙들고 논의 진행하고,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도 다른 아이들이 추궁받으니까 결국 벽보에 내 이름까지 밝히고, 혼자 방어 마법을 예습하는 동안 넌 뭘 했지?'

 

아무것도.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 유일하게 자랑스러운 것은 당신의 손자라는 사실이었음을.

 

손에 힘을 준다. 지팡이에서 비틀리는 소리가 난다.

 

우리의 평화는 그저 순리에 의해 찾아온 '새 시대'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다시피 하며 이 악물고 분전하던 할아버지께서, 래번클로를 나와 법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잠시 꿈을 접어두고 불사조 기사단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고모께서, 퀴디치 시합을 취재하는 기자로 뛸 때 행복했던 어머니와 식물을 만질 때 즐겁던 아버지께서 핏물로써 연 시대가 귀한 줄 몰랐습니다. 우리의 악보는 백지가 아닌 역사의 뒷면에 쓰여지는 것임에도 눈을 감고 외면했습니다.

 

불꽃은 너무나도 작고 미약해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고, 오직 온 몸으로 불살라 싸워야만 겨우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데. 옳고 그름은 다층적일지언정 분명 그 자리에 있었는데. 한 명의 신입생을 다툼의 현장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받고 미소로 화답하는 동안, 누군가는 수십 명의 학생을 구하고자 제 이름을 진창에 더럽히고 있었음에도... ...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만했어요. 제 힘을 과신했고요.

이 모든 것이 저의 실책입니다.

 

끼이이익... ... 비명처럼 휘어지던 지팡이가 부러지기 직전 자리에서 멈춘다. 싱클레어는 눈에 힘을 준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뺨이 한 차례 더 세차게 경련한다. 손등에 핏줄이 일어선다. 그는 마저 부러뜨릴 것처럼 팔목을 바깥으로 비틀다 끝내 그만두었다. 거칠어진 호흡과 함께 시선을 저 먼 곳으로 옮긴다.

 

그리고 이제 파편을 주울 시간이네요.

 

저는 가장 비겁한 그리핀도르고, 거짓을 논하는 위선자였으며, 지킬 줄 모르는 파수꾼이었고, 이 패배의 주역입니다. 제가 설파한 거짓 평화로 사람들의 귀는 닫혔고, 당신의 뜻을 이어가던 이들은 비웃음당했으며, 호그와트는 어둠이 지척까지 다가오는 동안 가장 취약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그 죄로 지팡이가 부러져야 마땅하나 동시에 당신이 남겨준 시대에 갚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빌렸던 평화는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때가 왔을 땐... ...

 

때가 왔을 땐.

 

그는 그 자리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는다. 답을 돌려주지 않는 저 먼 곳을 바라보면서.